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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03 08:35
연재소설: 뻐꾸기운다 (제42화)
 글쓴이 : 이지명
조회 : 266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다쳤을 때 엄마가 되어 너를 돌봐준 분이다. 내생명의 은인이고, 한데 소식을 알고서도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않겠니. 만나보고 싶구나.”

아직은 아니지만 수십 년 세월 외로운 골짜기에서 사람냄새를 잃고 살아온 엄마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어 춘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실은 아침에 모른 척 한 것이 제게도 내내 속에 걸렸어요. 이젠 모든 걸 밝힐 때도 됐죠. 기다려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춘희는 서둘러 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나섰다.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옥님의 얼굴이 한결 밝아보였다. 춘희도 차라리 일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젠 정태수와의 관계를 밝혀야 했다. 이 땅을 떠날 날자가 박두한 만큼 모든 것은 베일을 벗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을 질질 끌 시간도 없었다.

 

5

다음 날 중동탄광마을에 경사가 났다. 이른 아침부터 광산에서 출발한 중국화차가 탄광 구내로 연줄연줄 들어선다. 집에서 오리정도 떨어진 중동철도역에서 청진-신의주 행 열차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난 정태수는 한달음에 갱 사무실로 달려왔다. 춘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까마귀 날자 빼 떨어진다고 아내를 떠나보낸 순간에 받은 희한한 소식에 단숨에 오리 길을 달렸다. 벌써 구내에 놓인 간선 철길로 밀가루를 실은 화차가 석탄을 실을 빈 화차들을 달고 연줄연줄 들어선다. 탄광종업원가족들이 벌써 알고 오구작작 모여들었다.

 

탄광지배인을 위시한 간부들이 열차에서 내린 실무일꾼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들어선 화차들을 바라본다. 석탄을 실을 빈 화차들이 석탄적재장으로 통한 철길에 늘어섰지만 거기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선 곳은 바로 밀가루를 가득 실은 화차 앞이었다. 무개차에 하얀 밀가루포대들이 빼곡히 쌓였는데 위엔 투명한 비닐로 우기를 씌웠다. 밀가루를 부리고 들여 갈 정광을 실어야겠기에 유개차가 아닌 무개차에 밀가루를 실은 것 같았다.

 

구경나온 사람들은 탄광종업원가족들만이 아니었다. 농장 사람들도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채홍영감도 보였고 오지단지노친도 보인다. 만덕이는 뭐가 못마땅한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화차가 아닌 사람들을 쳐다보고 섰다. 태수는 밀가루를 보는 순간 방금 전에 보낸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났다. 요즘 끼니꺼리가 없어 늘 배고프게 살았는데 떠나자마자 식량이 도착했으니 너무 아쉬웠다. 떠날 때 도중 식사라도 듬뿍 싸 보냈더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힘든 이별을 했다. 역구내에 열차가 들어서자 아내는 승강대에 오르며 눈물을 훔쳤다. 떠나겠다할 적엔 덤덤하던 감정이 갑자기 격해져 태수도 눈시울을 적셨다.

 

진정 떠나는 아내를 보며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내는 그가 쫓아 보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홀가분할 대신 허전해지는 마음은 대체 무엇인지, 열차가 출발해도 아이를 업은 아내는 그냥 승강대에 서서 수건으로 눈물을 훔친다. 잊어서는 안 될 모습 같았다. 그렇게 떠난 열차가 시야에서 사라졌어도 태수는 그냥 우두커니 서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른 아침시간이어서 열차에서 내린 사람이 몇이 안 돼 역구내는 한적했다.

 

쌀쌀한 바람이 휘 불어와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흩날렸다. 으으으.......태수는 신음을 토하며 마침내 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내에게 보일 수 없었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 한참이나 넋 놓고 울었다. 꺼이꺼이 소리 내어 흘리는 눈물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못난 놈, 진정 뒤지도록 못난 놈이다.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질타의 목소리가 스스로 목구멍에서 튕겨 나왔다. 세상에 너 같은 바보가 또 어디 있을까, 너의 가슴엔 대체 무엇이 들었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동행해 온 아내를 그리도 치사한 보자기를 씌워 떠나도록 만들었단 말이냐? 모르는 이의 눈은 어물쩍 속여도 네 가슴에 얹힌 양심의 중압은 이제 어떻게 순화시키려고.......

 

탄광에 돌아와 앞에 선 밀가루화차를 보니 다시 아내의 가냘픈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메마른 세월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군에서 받은 상처만 아니라면 그렇게 떠나보낼 여자가 아니었다. 남들처럼 무얼 얻어 들여오는 기질은 부족해도 평생을 보듬어 안고 입 맞춰 주고 싶은 여자였다. 남편을 남편으로만 대한 여자가 아니었다. 아버지로, 스승으로 인생을 통째로 맡기고 하늘처럼 떠받들고 오로지 지아비의 그늘이 삶의 전부인 것으로만 알고 산 어질고 착해 빠진 여자였다. 지금 밀가루화차를 보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태수를 죄책감속에 몰아넣는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왜 눈물을 흘려요?”

먼발치에서 태수를 보고 다가온 춘희가 한마디 한다. 눈물범벅이 된 볼 성 사나운 얼굴을 든 태수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호젓한 곳이라면 춘희를 붙안고 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렇게 애틋해 하면서 보내긴 왜 보내요. 사내들이란 참

춘희는 냉랭한 어조로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탄광사무실 쪽으로 내려간다. 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태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내가 떠난 것을 춘희가 어떻게 알지?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서다. 순간적이긴 했지만 창피한 마음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껏 춘희를 향한 마음이 다 거짓으로 말짱 들켜버린 것 같다. 어느 새 눈물도 쑥 잦아들었다. 춘희를 알아보았는지 지배인을 위시한 탄광간부들이 그녀가 향한 사무실 쪽으로 급한 걸음을 하는 것이 보였다. 태수도 마음을 다잡고 그쪽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한편 광산에서는 아침부터 구내방송을 시작했다. 종업원들은 실었던 정광이 불합격 맞았고 싣고 왔던 밀가루화차까지 중동탄광으로 갔다는 소식에 모두 낙담이 돼 아침 출근을 해야 되나 안해야 되나 하고 속구구를 할 때였다. 방송은 광산마을집집마다 설치한 스피커를 통해서도 울려나간다. 아침 숟갈을 들 무렵 울려 퍼진 방송에 종업원들은 들었던 술을 멈추고 벙벙한 눈빛으로 서로 마주본다.

 

종업원 여러분 기쁜 소식 알려드립니다. 광산초급당위원회부비서인 양태산동지의 능란한 교제에 의해 중동탄광으로 들어가던 밀가루 전량에서 절반되는 삼십 톤이 곧 광산종업원배급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밀가루 배급은 배급소가 아닌 각 직장별로 나누어 주게 됩니다. 오늘 출근하지 않은 종업원은 물론 그간 결근일수를 합쳐 제하고 출근날짜만큼 공급할 예정이니 전체종업원들은 제 시간에 출근하길 바랍니다.”

 

아침 밥상에 앉았던 박상도는 방송을 들으며 눈만 거불거렸다.

, 삼십 톤이라야 종업원 한명에 열키로 정도밖에 안돌아 가는데 무슨 요란하게,”

마주앉은 철용이가 스피커를 보며 투덜거린다.

앤 정말, 밀가루 열 킬로면 한 달은 먹고 살아, 지금 풀과 미역으로 끼니를 때우는 집이 얼마나 많은데.......그리고 어떤 집은 종업원이 두셋씩 되는데 그게 적은 식량이야? 그리고 비싼 밀가루를 시장에 팔아 대신 옥수수를 사들여봐 두 배가 나와 두 배, 네가 세상물정을 알아? 개뿔도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누이가 덧 국을 들여오며 철용에게 눈을 흘긴다.

그런가? 근데 아부지. 저건 대체 무슨 소리요?”

뭘 말이냐?”

능수능란한 교제라며 양태산일 완전 추어올리잖소. , 맞다. 그러고 보니 아부지가 완전 넉카우드 됐네. 저 양가가 말이요, 내 좀 아는데 중동농장이발사인 그 여끼새끼 같이 생긴 에미네와 짜고 아부질 골탕 먹인 걸 거요 아마

철용이가 자신 있게 떠벌인다.

 

그런 게 아니다.”

아니긴, 그저께일로 아부지가 시당에 불려나가 눈알 쑥 빠지게 욕사발 처먹은 거 내 모를 줄 아우? 양가한테 완전 밀려갖고 무슨, 지금 광산여론이 얼마나 나쁜데.......쳇 그러고도 뭐 날보고 일 년만 탄광에서 견디라구? 이젠 일 년이 다 돼오는데 대체 날 어떻게 할 생각이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넌 빨리 탄광에나 가봐라 광산 일에 신경 쓰지 말고

, 꼴좋네, 젊은 놈 가랑이에 끼어 헐떡거리는 꼴이란,

 

박상도의 손이 우들우들 떨린다.

붙는 불에 키질이라고 이놈 자식. 보자보자 하니까 야, 이놈아 이자 말 다시 해봐라 뭐 어디에 끼었다고?”

젊은 놈 가랑이요. 양가놈에게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집에서 큰소린,

에익, 이 개만도 못한 놈

얼결인가, 아님 벼르고 벼른 폭발인가, 박상도의 손이 아들의 귀뺨을 보기 좋게 내갈긴다.

, 왜 때리우?”

철용이도 가만있을 리 없다. 쟁강 와르르, 부자사이에 놓였던 밥상이 뒤엎어졌다. 바닥에 쏟아진 국물이 박상도의 옷섶까지 튀어 올랐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행패야

부엌에 나갔던 누이가 뛰어 들어오며 제 애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철용을 콱 밀친다. 박상도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그 틈에 방바닥에 뒹구는 김치종지를 들어 힘껏 쥐어뿌렸다. , 철용의 머리를 스친 사기종지가 바람소리를 내며 맞은 편 벽에 부딪쳐 박살났다.

이 개자식,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빗맞았어도 철용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독 오른 애비에겐 그게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예 죽일 잡도리다. 손에는 어느 결에 잡았는지 큼직한 국사발이 피 흐르는 아들의 머리위에 쳐들렸다. 질겁한 철용이가 홱 돌아 문을 차고 도망했게 망정이지 조금만 지체됐더라면 그놈의 모가지장식품이 아예 형체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부지이......”

딸이 울음을 터트리며 아들을 쫓으려는 아비를 와락 잡는다.

참아요. 아부지, 이런 모습 동네 사람들이 보면 또 뭐라 하겠어요. ? 아부지이

박상도는 손에 든 사발을 출입문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허허탄식했다.

이놈의 집안 망했어,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 ? 으흐흐흐

주저앉은 박상도가 꺼이꺼이 울음을 터트리자 철옥이도 와락 아비를 부여잡고 대성통곡한다.

밀가루 공급과 관련해 바삐 출근하던 사람들이 때 아니게 들리는 울음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렸다. 보통 집도 아니고 당위원회비서의 집안에서 이 무슨 해괴한 울음소리란 말인가?!

 

삐쭉, 비웃음을 띤 사람도 있고 벙벙해 이 사람 저사람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무리를 이뤘다. 저들끼리 뭐라 시시구구 재재 뻥긋거린다. 급해 맞아 맨발로 뛰어 나왔던 철용은 그러는 종업원들을 보자 그만 울화가 치밀었다. 이것들이? 하늘같은 당 비서집 앞에 겁 대가리 없이 몰려서서 멋대로 잴잴거려? 아마 그리 생각한 듯 이 푼수 없는 놈이 왝, 내지르는 소리가 아주 가관이다.

 

, 이 개먹어리종자들이 뭐라 떠들어, 당장 헤쳐 가지 못해?”

이쯤 되니 헤쳐가지 않을 수도 없다. 근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속에는 반드시 담깨나 건사한 사람도 있는 법, 없는 세월에 무얼 걷어먹었는지 불룩 나온 배를 내민 사람이 척 나서며 빽 소리친다.

, 이 팔삭둥이 같은 놈아 너 이리 좀 나와. 이 같잖은 새끼,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냐?”

팔소매를 쓱쓱 걷어 올리며 다가드는 품이 심상치 않다. 그 통에 혀를 차며 가려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선다. 철용이는 이건 또 웬 놈팽이야, 하고 뒷손으로 탕 문을 닫으며 다가오다가 똥배의 얼굴을 가까이하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처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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