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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14 00:17
연재소설: 뻐꾸기운다 (제43화)
 글쓴이 : 이지명
조회 : 309  

, 고수형님이 어떻게?”

사람은 알아보는구나. 이 구실 못할, 아이고 이걸 콱

똥배가 주먹을 쳐들자 철용은 기겁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짜르르 웃음이 터졌다.

비서도 골 아프겠네. 저따윌 새끼라고.......에 퉤, 그만 갑시다.”

똥배가 가래침을 뱉으며 걸음을 떼자 모였던 사람들도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흩어져 갔다.

 

아침도 설치고 서재에 들어앉은 박상도는 멀거니 천정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뽑았다.

철용이 말처럼 밀가루화차가 광산 구내를 빠져나가자 종업원들의 원성이 빗발쳤었다. 그 원성의 닿는 초점이 다름 아닌 당 비서라는 것도 박상도도 잘 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다 완전 코피가 터진 셈이다.

 

몇 년 전 흑연정광이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갈 때 식량보다는 설비부터 들여오자는 의견을 박상도자신이 막은 것은 사실이다.

 또 그러한 결정을 전해들은 종업원들 역시 우리사정을 알아주는 건 당 비서밖에 없다며 그때 저저마다 박상도를 추어올렸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일 앞에선 내 언제 그랬냐 싶게 싹, 낯을 바꾼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느니, 그때그때 때맞춤이나 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완전 물이 빠졌다는 둥, 자식은 어시를 잘 만나야 하듯 노동자는 간부를 잘 만나야 하는데 이젠 볼 장 다 봤다는 식의 별의별 소리가 다 터져 나왔다. 실은 거기에 날개를 달아 준 것이 바로 양태산이다.

 

정광은 불합격 맞아 단 1톤도 화차에 실어 보내지 못했는데 절반이나 되는 밀가루를 당겨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능력가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정광을 도로부릴 때 이제는 중국과의 거래는 끝이 난 것으로 모두 생각했다. 이 세월에 그렇게만 되면 광산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때맞춰 보고를 받았는지 시 당 조직부의 호출을 받고 어마지두 달려갔지만 가서 받은 대접은 심한 야유와 질타였다.

 

박상도의 입에서 다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당위원회사무실에 나가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양태산의 간교한 놀음이 그림처럼 안겨든다. 문득 여끼새끼 같은 이발사 에미네와 짝짜꿍을 했다던 방금 전 철용이 말이 떠올랐다.

그때야 그는 큰 실수를 했다는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큰 기업소당비서가 하잘 것 없는 농장이발사와 만나 대체 무얼 논하느냐 하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 같았다. 지금 같은 때 당 간부의 위신이라는 게 대체 뭐냐 이거다. 얼른 만났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 박상도는 우쩍 일어나 옷걸이에서 쥐색 가을코트를 벗겨 입었다. 앞에 놓인 체경에 마주서니 헐쑥하게 살 빠진 얼굴이 자기를 내다본다. 초점도 잃은 멍청한 눈길이다. 등도 구부정해졌다. 윤기 흐르던 머리는 벌써 반백이 됐고 번지르르하던 피부엔 굵은 주름만 얼기설기 거미줄을 쳤다. 걸음 한 번에 모두 머리를 숙이던 위풍은 말짱 간데없이 사라졌다.

(지나온 세월의 박상도는 없구나.) 하고 박상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배급이 정상으로 공급되던 그때가 무척 그리웠다. 광산자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악심 먹고 덤비는 젊은 힘을 무슨 수로 막을지,

요즘 들어 박상도는 왠지 당비서자리가 이젠 자기차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스스로 떠오르는 생각의 뒤끝은 한없이 서글펐고 또 허전했다. 이 세월에 직위마저 빼앗기면 어떻게 살까하는 근심이 불쑥 육신을 떨리게 한다. 지나온 세월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주저도 없이 그런 생각을 모아 싫다는데도 늙은 머리에 꽉 채워준다.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마당에 정차한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기사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를 부축했다. 언제 봐야 고마운 사람이었다. 기름이 공급되지 않아 뛸 수없는 차를 기사는 손수 개인업자들과 거래해 움직였다. 언제인가 당 비서가 자기의 충심을 헤아려 줄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하나 날이 갈수록 그런 바람의 실현은 묘연하기만 하다.

중동농장이발소로 가세

알겠습니다.”

기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각자 깊은 생각에 골몰했다.

내가 이젠 농장이발사 따위를 찾아 차까지 움직이다니 세상일 참, 만사요지경이로군.’

 

얼마 후 박상도가 최춘희를 만난 자리는 이발소가 아닌 개성식당이었다. 전전 날 저녁 양태산이 앉았던 바로 그 방이다. 춘희는 선선히 그와의 면담에 응했다. 필요상 만날 이유가 희박했지만 찾아 온 그를 나무람 없이 그 방에 깍듯이 초대했다. 아직 점심전이어서 식당은 조용했다. 향이가 안내하는 대로 방에 앉은 박상도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하는 궁금증이 나서 어서 춘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바깥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방금 자기를 안내하던 처녀애의 어리광 섞인 부름소리가 들렸다. 어험, 어험 박상도는 괜히 큰 기침을 떼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내심 긴장해지는 심적 변화를 박상도는 언뜻 잠재울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하찮은 이발사인데 왜 기척 한 번에 육신이 굳어지는지, 어디서나 당당했던 육신을 순식간에 흐트러지게 만드는 이 알지 못할 위압감.......아마도 박상도는 지금까지 당 비서와 마주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위압감에 스스로육신을 오그렸음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사실 그는 이 중동지대의 제왕이나 다름없었고 싫던 좋던 무조건 받들어야 할 어른임은 분명했다. 이제 그 허물 수 없는 지위는 끝이 난 것인가?!

 

미닫이가 열렸다. 박상도는 들어서는 여인의 자태를 보고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눈이 부셨다. 오호.......이래서 이 여자와 마주서는 사내들이 모두 경황없이 오줌을 갈겼는가?! 스스로 경직되는 느낌에 박상도는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반나마 커진 늙은이의 눈을 직시하며 들어 온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여인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박상도는 그만 소스라쳤다. 소스라쳤을 뿐더러 눈에서 번쩍, 섬광이 일었다. 아니 가슴에서 일었다 해야 정확하리라 이건, 이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잃어버린 첫사랑이 지금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

 

모옥님, 죽었던 첫사랑이 다시 환생해 앞에 나타났다. 이럴 수가? 박상도는 종내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후들후들 떨며 자리에 앉았다. 머리를 들면 저 환상의 얼굴이 금방 일그러지며 갈고 갈아 날을 세운 예리한 손톱으로 확, 두 눈알을 후벼 팔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야, 설사 그렇대도 젊은 날 세상 좁게 날고뛰며 자기의 품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던 여자였고 그녀 역시 자신을 둘도 없는 반려자로 한없이 사랑했었는데 설마 그렇게 할퀴기야 할라고? 그 여자 앞에만 서면 온갖 시름 다 녹아 쭈그러진 가슴이 사랑으로 충만 돼 죽었던 기가 살고 앞이 넓어져 세상천지가 다 제 것처럼 한없이 좁아보였었다.

 

그러나 박상도는 강수에 얼굴이 타버린 여자를 미련 없이 버렸다. 정말이지 코푼 종이처럼 내버리고 다시 돌아보지 않았었다.

차오르는 숨을 애써 눅잦히며 박상도는 천천히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한 눈길이 까딱 움직임 없이 직시하고 있었다. 아니겠지 아니야 그냥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겠지. 옥님이라면 저리도 젊을 수야 없지 않은가? 아니면 혹, ? 미혼의 몸으로 아기를 낳고 자기 품에 매달려 통통 가슴을 치던 그 애처로운 모습이 마주보는 여인의 얼굴위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니야, 그것도 아닐 거다. 내가 지금 착각으로 머리가 혼동된 게야.”

초점을 잃은 박상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춘희의 나직한 물음이다. 하나 박상도는 그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듯,

, .......성씨를 어떻게 쓰는지

은근한 목소리다. 모든 것을 초월한 간절한 바람이 섞인 물음이었다.

최 씨입니다. 이름은 춘희라 하구요.”

, 그러시오?!”

박상도의 목소리엔 환희가 섞인 듯싶었으나 힘은 없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아니 아니요. 잠간 당신을 보며 뭔가 혼동되었던 모양이요. 그럴 리야 없겠지, 어찌 그런 일이.......”

 

(맞아요, 아버지. 혼동이 아닙니다. 하지만 난 딸로서 당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가진 그 지위, 당신이 휘두를 수 있어 좋았던 권력의 무상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알게 한 후 살아온 삶을 저주하게 만들 겁니다. 그게 내 드팀없는 인생목표랍니다. 미안하군요.)

몸이 옥죄어 들었지만 춘희는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높은 광산 당 비서동지께서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셨습니까?”

약간 이죽대는 어투였지만 그걸 감지할 능력마저 박상도는 이미 잃어버렸다.

, 저 다름이 아니고, .......”

말조차 떠듬거려졌다.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이 여자를 왜 보려 했던지, 만나서 무슨 말을 하려 했던지,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 흑연정광수출문제 때문입니까?”

흑연정광수출?! 아 맞소. 정광품질이 나빠 불합격 되었음에도 많은 밀가루를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소. , 이건 진심이요.”

그건 제가 받을 인사가 아니지요. 그건 양태산이란 분이 해낸 일입니다. 그런 능력 있는 일꾼을 곁에 둔 비서동지가 부러울 뿐입니다.”

그렇소. 그 사람은 분명 능력 있는 사람이지. 맞소. 그건 나도 인정하오. 아무튼 감사하오.”

 

박상도의 등골로 굵은 땀이 흘렀다. 무슨 정신에 말을 하고 무슨 개뼈다귀 같은 인사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순간이 빨리 흘렀으면 하는 것 뿐, 그는 서둘러 일어났다. 이집 단고기 맛이 괜찮으니 잡숫고 가라는 춘희의 사교어린 말도 그는 듣지 못했다.

덜컹덜컹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승용차가 몹시 들췄지만 박상도는 오로지 한 생각, 30여 년 전의 과거를 헤맸다. 험상한 얼굴, 차마 들여다 못 볼 처참한 얼굴이 마냥 눈앞에서 춤을 춘다. 아니 당장 자기의 뻔뻔한 얼굴을 할퀼 듯 마구 육박해온다. 으허허.......박상도는 마침내 얼굴을 싸쥐고 꺼이꺼이 울었다.

 

(옥님아, 날 죽여 다오, ? 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날 부둥켜 잡고 놓아주지 않느냐, 널 버린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그래서, 그래서 더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기사는 차를 세웠다. 육중한 몸이 차체까지 흔든다. 어떤 사연이 저런 슬픔을 만드는지 젊은 그로선 알 수 없었지만 이럴 때만이라도 비서에게 안식을 주고 싶었으리라........덕분에 박상도는 실컷 울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지금껏 어디서든 울어보지 못한 가슴 찢는 흐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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