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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6 14:39
수필: 3월에 쓰는 편지1 (김정애 작)
 글쓴이 : 이지명
조회 : 2,759  

수필.

 

3월에 쓰는 편지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장문의 편지를 쓴다. 끝도 없는 하늘에 대고 한없는 눈물의 편지를 쓴다. 3월은 나와 아들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한 달이다.

춘삼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때도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흐릿한 운무에 세상천지가 종일 어둠에 눌린 듯하다. 게다가 싸늘한 기운까지 곁들여 꽃눈이나 틔울지 걱정스럽다.

 

지리상 위쪽에 위치한 북한은 여기보다 더 추울 것이다. 따뜻한 강남이 이 정도면 아마도 북한 땅엔 진눈깨비가 날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날에는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이 산에 나무하러 갔을지, 아니면 식구들의 가장노릇을 하느라 바다로 미역 건지러 갔을지 더 걱정이다.

 

내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5살배기 아들과 세 살 난 딸내미를 건사하느라 뼈에 가죽만 남은 아들은 산으로 바다로 쉬지 않고 돌아쳤다.

아무리 애써도 집안 식구들은 나날이 피골이 상접했고 아기들은 때식이 지나도 퍼런 죽을 끓이던 가마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게 눈 감추듯 다 퍼먹은 죽 그릇에 숟가락을 꽂은 채 빈 그릇을 놓으려 않던 손자손녀가 요즘 따라 더 눈에 밟힌다. 손자 손녀들은 날마다 배를 곯고 있을 텐데 할미가 돼가지고 먼저 한국으로 온 것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끼마다 목이 메인다.

 

흰 쌀밥을 담은 그릇에 온통 손자 손녀의 얼굴이 가득 채워져 할머니, 나 배고파!”라고 부르짖는 같아 마음이 미어지듯 불편하고 아프다.

 

나는 사라진 딸로부터 만나자는 기별을 받고 떠났다가 대한민국까지 오게 된 탈북 노인이다. 한 마을에서 모여 사는 시댁과 친정식구들을 돌보느라 힘들었던 딸은 어느 날 간다온다 말도 없이 바람같이 사라졌다.

 

안전부와 보위부에서는 딸의 행방을 대라고 나와 영감, 제대하여 갓 살림을 꾸린 아들까지 날마다 불러내어 조사를 하였고 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식구들은 그렇게 눈물의 2년을 보냈다.

 

밭에 콩을 심으며 눈물을 심었고 감자를 캐면서도 눈물을 뿌렸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이 울고 있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울지 마오. 그 집 딸은 어디가도 잘 있을 거요. 원래 여기 시골에 있을 사람도 아니요. 이제 보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언제인가 잘 돼서 딱 나타날 거요.”

 

사람들은 집 떠난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 그 사람도 편치 않다며 딸을 위해서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 말에 나는 차고 넘치는 그리움과 눈물을 딸의 무사안녕을 빌며 참아냈다.

그리고 2년 후, 정말 약속한 것처럼 딸에게서 기별이 왔다.

그동안 해주에 살다가 나진에 장사를 왔으니 잠깐 만나자고 한다.

집을 떠난지 2년 세월 마을에 다시 나타나면 동, 보안서, 보위부에 잡혀가 문책받고 단련대나 교화소로 보내질까 두려워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리라.

 

딸의 안전을 위해 나는 남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딸이 보낸 사람과 길을 떠났다. 죽은 줄 알았던 누나에게서 기별이 왔다는 소식에 아들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릴적부터 한번 다툼없이 화목하게 자라온 형제여서 말이 없던 아들에게도 누나의 존재가 꽤나 컸던 모양이다. 아들은 떠나는 나에게 주머니를 털어 빨리 다녀오라며 얼마 안 되는 돈까지 쥐어 주었다.

그래, 누나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내 눈으로 보고 곧 돌아오마.”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조막만한 손자손녀가 집을 나서는 나를 보더니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늘 업고 안고 먹여주던 할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악을 쓰는 울음에 다시 걸음을 돌려 꼭 안아주며 약속했다.

 

할머니가 뚝 그치면 맛있는 사탕 사다 줄 게.”하고 어르기다가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애들을 아들에게 억지로 떼어놓고 집을 나섰다.

 

나진에 있다던 딸은 회령에 있는지 나와 데리러 온 사람은 어느 강가로 나갔다.

여기가 어디에요?”

두만강입니다. 강 건너 저쪽에 따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만강 건너 저 쪽이라면...중국... 중국 땅이 아니에요?”

딸의 얼굴을 볼 생각에 한달음에 왔건만 국경을 넘어 불법월경을 한다니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주춤거리는 새에 데리러 온 브러커가 손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 회령입니다. 어머니 모셔왔습니다. 지금 바꿔드리겠습니다.” 손 전화는 곧바로 떨고 있는 내손에 들려졌다.

 

받으십시오. 어머니 따님입니다.”

엄마, 엄마, 나 영숙입니다. 내 목소리 들립니까?”

그리운 딸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가슴에 파고들었다.

, 어떻게 된 거니? 내 딸 영숙이 맞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를 알려야지 집에서 기다리느라 식구들이 다 지쳐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움이 북받친 나머지 나는 전화기를 들자마자 울화를 마구 터뜨렸다.

엄마, 미안해요. 식구들은 다 잘 있죠? 여기는 국경이여서 긴 통화는 어렵고 엄마가 잠깐 건너왔다 가세요. 제가 그동안 모은 돈을 가져다 동생이랑 살림에 보태세요. 잠깐이면 돼요. 걱정 말고 건너오세요.”

 

양쪽으로 브로커와 함께 온 국경경비대 군인 6명이 늘어 서 있다. 저 건너에는 딸이 기다리고 있다. 초겨울의 차디찬 강물에 들어서는 나에게 군인들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나는 중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금방 통화한 딸은 그곳에 없었다. 훗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딸은 죽기 전에 엄마를 좋은 곳에 데려온다며 대한민국 서울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딸은 내가 중국을 건넌 후에도 브로커를 따라 움직이면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전화통화를 계속했다. 나는 이제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 볼 것 같아 딸을 만나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얼어붙은 몽골사막에 들어섰다. 몇날 며칠을 걸어도 나타나지 않는 인가. 걸음을 멈추면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은 혹독한 추위, 끈질기게 뒤를 쫒는 늑대무리. 한 치를 내다볼 수 없는 갈밭.

 

길을 잘못 들어섰는지 오도 가도 못하고 천신만고 눈길에 쓰러진 몸이 동상으로 얼고 부풀어 정신이 가물거릴 때 우리는 몽골 국경수비대를 만났다. 전신동상으로 형체가 없어진 때에도 나는 딸의 얼굴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들을 찾기 시작했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힘들게 아들과 통화했다.

 

 

처음 아들과 통화하던 날, 울음이 터진 나는 정작 짧은 통화시간에 하고 싶었던 말은 못한 채 계속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저 편에서 아들이 흐느끼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두만강을 건널 때에도, 몽골의 강추위에 전신 동상을 입고 쓰러졌을 때에도 나는 딸의 얼굴을 보고 아들에게 꼭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일어났다.

 

17살 되던 해 고등학교를 마치며 군복을 입고 군에 입대하는 아들에게 나는 꼭 살아서 돌아와 줘라고 두 손을 꼭 쥐었다. 입대할 때에는 남들보다 체격이 작아서 열악한 군 생활을 견뎌낼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10년을 하루같이 가슴을 조였지만 아들을 용케도 견뎌내고 돌아왔다.

얼굴에 보슴털이 보스스하던 아들의 귀엽고 앳된 모습은 10년 군복무기간에 구레나릇이 검은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나는 군부대의 식량사정으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군인들이 많은 속에서 살아 돌아 온 것이 무척이나 장하고 대견해 아들을 붙잡고 하늘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런 아들과 몇 년을 살다가 딸을 찾으러 떠나며 두 번째 이별을 겪었다. 고향을 떠날 때는 브로커의 말대로 딸을 만나 생활비를 받아 가지고 금방 돌아와야지, 하는 마음에 엄마 누나를 만나고 금방 돌아올게라는 말만 남기고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내가 떠나지 안을까봐 딸은 비행기에 탑승하기까지 속였던 것이다. 정작 서울에 와보니 내 평생에 상상도 못한 처음 보는 세상임은 틀림없었다.

쌀값도 저렴하고 먹고 살기 참 좋은 세상인데 불행하게도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좋은 세상으로 데려다 준 딸이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에 야속하기도 했다.

 

두고 온 아들이 너무 너무 보고 싶은 날에는 이불속에서 밤새도록 눈물을 훔치며 괜히 딸을 원망했다. 차라리 굶어죽어도 같이 곁에 있어줄걸 하고 말이다. 고등학생 때 이 후로는 가슴으로 제대로 품어보지 못하고 항상 떠나보내야 했던 두 아들, 이별해야만 했던 아들들. 그 아들들을 이젠 전화로 밖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우리 모자는 계속 울었다. “아들, 보고 싶다. 엄마가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계속 눈물을 흘리며 손끝으로 아들의 두 볼을 어루만질 수 없지만 살아 있어줘서 또 한 번 감사했다.

 

내가 없는 동안 가장 구실을 하느라 굶어 죽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매일 가슴을 조여 온 나로서는 정말이지 살아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얼마동안은 아들의 여윈 모습이 눈에 밟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길가는 30~40대의 남자를 보면 아들 같아서 눈을 떼지 못한다. 보고 싶은 아들생각에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아들에 대한 그리움만 깊어 가던 어느 날 나는 뜻밖에 북한에서 걸려온 수신자 부담의 국제전화를 받게 되었다. 새벽 2시쯤 울리는 다급한 전화벨 소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게 했다.

 

며느리의 떠는 목소리가 나를 당황하게 한다.

어머니...” 단마디로 부르고는 계속 울기만 했다.

나는 뭔가 가슴이 훌쩍 내려앉는 느낌을 가까스로 누르며 무슨 일 있냐고 다그쳤다. 며느리는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고는 한참 지나고 나서 흐느끼면서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고... ... ...

새벽을 깨우고 온 몸이 피가 다 멈추는 듯 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온 몸의 세포가 굳어진 듯 했다.

너무 기가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거짓말일거라 믿고 싶었다.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며느리의 흐느끼는 소리만 기억난다. 한달 전 구정을 맞아 통화 할 때만해도 어머니. 저 조금 아파요. 그런데 젊으니까 괜찮아요.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시고 어머니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 다시 만날 때까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라고 안심시키더니.

얼마나 아팠을까. 누나도 엄마도 없이 그 힘든 세상을 살아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그제야 온 몸의 수분이 눈물이 되어 빠지고 있었다. 아직 쌀 한가마니를 전해 주지 못했는데, 어미가 되어 아직 생활비 한번 제대로 쥐어주지 못했는데 그 젊은 나이에 약 한 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떠나다니...

 

내가 곁에 있었더라면 아들이 아픈 것을 조금 일찍 알았을 텐데. 아무도 모르게 혼자 아픔을 겪었을 아들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얼른 거린다.

전에 조금 아프다고 할 때, 걱정 말라고 했을 때, 약 한 첩 사먹게 돈이라도 조금 보냈을 걸. 미련한 어미는 괜찮다는 말을 그렇게도 미련하게 믿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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