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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구하기 힘들었던 돼지고기 매번 차례상 올리던 어머니… 당신 제사상엔 옥수수밥만”

  • LV 12 이지명
  • 조회 276
  • 2017.10.02 14:21
[문화] 2017 추석특집 게재 일자 : 2017년 09월 28일(木)
     
이지명 탈북작가 (국제PEN망명북한센터 이사장)

먹을 음식 구하기 어려웠어도 제사상엔 꼭 고기·햅쌀밥 올려 어린맘에 추석 기다렸던 이유

‘고난의 행군’ 속 어머니 사별 부실하게 모셨던 첫 추석 이후 南 오기 전까지 제사상 못 올려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가 다가오는데, 한반도는 북핵 위기로 여느 때보다 긴장 속에 추석을 맞고 있다. 추석 명절을 쇠는 전통이야 남과 북이 다를 게 없다. 잠시나마 시름을 놓고 한 핏줄임을 상기하고자 남과 북의 작가가 회고하는 추석 이야기를 싣는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한승원(78)은 여전히 작품 활동을 쉬지 않는 남쪽을 대표하는 원로작가다. 함북 청진이 고향인 이지명(64)은 자작농(부농) 집안이었다는 출신 성분 탓에 조선작가동맹 회원이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자유로이 작품을 쓸 수 없었다. 그에 분노해 1998년 탈북을 단행했고, 대륙에서의 방랑생활을 거쳐 남쪽에 정착해 작가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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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산 지 벌써 13년이다. 앞에 놓인 13년보다 지나간 13년의 추억은 참으로 가슴 뿌듯하다. 크게 한 일도 없고 내세울 일은 더더욱 없지만 이 13년간 나는 상상으로만 그려보던 남쪽 나라를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는 기간이었으니 말이다. 그 기간 국제PEN망명북한센터에서 일한 5년 세월이 내겐 평생토록 기억할 소중한 날들이었다.

베일에 가려진 북한 현실을 문학에 옮겨 남쪽 나라와 세계에 알리는 일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북한 현실에 관한 소설을 쓰며 나는 북한 사람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그들의 애환 속에 늘 자신을 묻고 살았다. 

비록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가지만 그곳은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고 꿈에서도 그리워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소중한 땅이어서였다. 언제면 그 땅에도 서광이 비칠지, 산해진미를 마주하고서도 즐거움 대신 먼저 눈물이 글썽해짐을 어쩔 수가 없다.  

1915년생이었던 어머니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5년에 돌아가셨다. 팔순이면 북한에선 살 만큼 사셨다고 할 수 있지만 내겐 늘 가슴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는 음식 중에서도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나 북한에서 돼지고기는 주요 명절에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대접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생긴 돼지고기도 잡숫지 않고 소금에 묻어 두었다가 추석 때가 되면 그걸 익혀 제사상에 올려놓곤 하셨다. 

조상뿐이 아닌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 산소에도 꼭 돼지고기를 삶아 올려놓곤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다. 이후 나는 해마다 추석 명절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 아버님 산소에 가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덤 앞 댓돌에 놓일 음식과 돼지고기가 욕심나서였다.

어머니는 추석 제사상에 절대 묵은쌀로 지은 밥을 올려놓지 않았다. 늘 햇곡식을 정히 절구로 찧어 정성껏 밥을 지어 올려놓곤 하셨다. 북한 함경북도는 추운 지대여서 8월 추석이 9월로 당겨질 때에는 햇곡식 얻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미리 남쪽인 황해도 쪽에 직접 나가 햅쌀을 구해오곤 하셨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해방되는 해 추석 제삿밥을 짓기 위해 구들에 벼를 널어 말리고 있었는데 세 살잡이 둘째 딸이 어정어정 걸어가 거기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밖에서 들어오며 그걸 본 순간 어머니는 온몸을 사로잡는 전율에 화들짝 놀라 애를 물린 다음 오줌에 젖은 벼를 급히 모아 치우고 젖지 않은 벼를 찧어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석날 저녁부터 둘째가 고열로 앓기 시작했다. 의원을 불렀으나 전혀 차도가 없었다.  

며칠 고민하던 어머니는 짚이는 것이 있어서인지 논에 나가 잘 여문 벼를 잘라다가 아랫목에 정히 말렸다. 그걸 찧은 쌀로 진지를 지어 다시 제사를 지냈다. 놀랍게도 즉시 효과가 일어났다고 한다. 제사상을 물리기 바쁘게 고열에 시달리던 둘째 딸이 “엄마 나 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에이 거짓말. 엄마는 미신쟁이”하고 얘기를 듣던 나와 형이 그때 혀를 빼물었는데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천둥같이 화를 내셨다. 조상을 그렇게 성의 없이 모시면 언제든 화를 면치 못한다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1995년 추석에 어려운 살림이지만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일가와 아버지가 묻힌 산소에 아껴둔 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차리셨고 그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 추석 때 나는 어머님의 제사상에 햅쌀밥이 아닌 옥수수밥을 지어 올렸다. 식량 미공급과 함께 햅쌀은커녕 여느 쌀도 구할 수 없어서였다. 생전 어머니가 그처럼 즐기시던 돼지고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탈북하기까지 8년간 단 한 번도 돼지고기는 물론 햅쌀밥을 지어 올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것이 늘 아픈 추억으로 심신을 괴롭힌다. 언제면 북녘땅에도 서광이 비쳐 대접하고 싶은 좋은 음식을 부모님들 상에 부담 없이 올릴 수 있는 세상이 올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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